검색결과
'김종필 오히라 메모'에 대한 통합 검색 결과 : 전체 26건
-
문서사료 1건
-
사진사료 3건
-
- 피켓을 들고 한일회담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상대 학생들
-
등록번호 : 00742398
날짜 : 1964.03.27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취소하고 평화선을 사수하라'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데모에...
-
- 피켓을 들고 한일회담 결사 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상대생들
-
등록번호 : 00742399
날짜 : 1964.03.27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취소하고 평화선을 사수하라'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데모에...
-
- 플래카드를 들고 한일회담반대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벌이고 있는 서울상대생들
-
등록번호 : 00742404
날짜 : 1964.03.27
구분 : 사진필름류 > 사진
기증자 : 경향신문사
요약설명 : '김종필-오히라 메모를 취소하고 평화선을 사수하라' 등의 결의문을 채택하고 데모에...
-
-
사료 콘텐츠 1건
-
일지사료 21건
-
- “평화선 철폐 고려” 최덕신 단장 밝혀
-
일자 : 1961.7.22
분류 : 한일협정추진 > 한국정부
요약설명 :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면서 청구권문제는 사실상 타결되었지만, 청구권 합의의 이행을 위해 평화선 문제가 함께 해결되어야 했다. 그러나 한국 국민들은 이미 평화선을 영해로 인식하고 있었고, ‘해양주권선언’이라는 명칭에서와 같이‘주권’의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따라서 박정희 정권은 평화선이 영해를 규정하는 선이 아니라는 것을 적극 홍보했지만 평화선이 불법이라는 국제사회의 비난과 함께, 한국 어민의 생명과 주권을 걸고 일본과 흥정한다는 한국 국민들의 거센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아울러 한국인들에게 평화선은 대일 민족감정의 상징이기도 했다. 실제로 ‘평화선 사수’는 한일회담 반대 시위에 가장...
-
- 김종필-오히라 제2차 회담, 한일협상 내년 봄 조인키로, 청구권문제 이외의 평화선문제 등은...
-
일자 : 1962.11.12
분류 : 한일협정추진 > 한·일
요약설명 : 김-오히라 2차 회담을 크게 보도하면서 양 측의 주장을 3억 대 3억 5천만 불 또는 2억 5천만 불 대 3억 불로 차액이 5천만 불로 줄어들었다고 보도하고 있다.『동아일보』 1962.11.13 석1면. 이 회담에서 한일 양국은 청구권 총액에 대한 합의에 도달했다. 그리고 단독회담 후 생길 수 있는 해석의 차이를 방지하기 위해 메모를 작성하자는 한국 측의 제안을 일본이 받아들임에 따라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작성되었다. 그러나 이 메모에는 금액의 명목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았다. 이는 메모가 규정한 금액에 대해 한일 쌍방이 대내적으로 그 명목을 편의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기 위한 포석이었다. 일본 측은 이 금액의...
-
- 이케다 수상, 청구권결정 보류
-
일자 : 1962.11.28
분류 : 한일협정추진 > 일본
요약설명 : 대한 일본 측의 최종 단안을 보류했다. 이케다수상은 ① 청구권과 차관의 지불연한이 분명하지 않다. ② 다른 동남아 제국에 대한 경제협력과의 균형이 결여되어 있다. ③ 외원자금의 조달방법 중 해외경제기금은 좀 더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오히라외상안을 더 검토하라고 지시했다.『경향신문』 1962.11.29 석1면.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어디까지나 잠정적인 합의이기 때문에 양국 정상의 재가가 필요했다. 박정희 의장은 즉시 김-오히라 메모의 양해선을 받아들였지만 일본 측은 사정이 달랐다. 이케다수상은 청구권에 대한 지불방식,조건 등 검토할 문제점이 남아있으므로 재가를 보류한다는 조치를 취하였다.(이원덕, 『한일 과거사...
-